グレースオルトGHQ看護少佐が勤務した日本統治期に元山の病院に関するメモ

 カナダ人宣教医ロバート・ガリアー(Robert G. Grierson / 韓国名:具禮善February 15, 1868 – May 8, 1965

his medical degree from Dalhousie Medical College in 1897

「元山プレスビタリアン病院(元山長老教病院)」


1. 宣教の拠点と元山

1898年にカナダ長老教会の初代派遣宣教師の一人として訪韓したガリアーは、当初、元山を拠点に韓国語を学び、宣教活動に着手した。

当時、元山にはカナダやアメリカの長老教会が拠点を置いており、ここでの経験が後の活動の礎となった。


2. 城津での献身

彼の最も主要な業績は、元山からさらに北に位置する城津であった。

• 済東病院の設立: 城津で診療所を立ち上げ、後に「済東病院」へと拡張した。これがこの地域における近代医療の先駆けとなった。

• 独立運動への支援: 1919年の三・一独立運動の際には、負傷した人々を治療し、運動を支援した。その功績により、1968年に韓国政府から建国勲章が贈られました。

3. 歴史資料としての「元山長老教病院「元山プレスビタリアン病院」については、当時の宣教記録において、元山・城津・咸興などの北東部一帯を管轄していた長老教会関連資料に見つけられる。

ガリアー自身、あるいは彼と同時期に活動したケイト・マクミラン(Kate McMillan)などの宣教医師らは、元山と他の拠点を頻繁に行き来しながら診療にあたっていた


• 人名: Robert G. Grierson / 구례선(具禮善)

• 病院名: 제동병원(済東病院 / Sungjin Hospital)

• 地名: 원산(元山 / Wonsan)、성진(城津 / Songjin)

• 組織名: 캐나다 장로교회 선교부(カナダ長老教会宣教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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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북 성진 선교지부 개설, 제동병원·보신(여)학교 설립

그리어슨 선교사
그리어슨 선교사

● 친구 맥켄지의 죽음이 한국으로 불러들이다

로버트 그리어슨(Robert G. Grierson, 구례선, 1868~1965)은 1868년 캐나다 동부 노바스코샤 할리팍스에서 아버지 존 그리어슨과 어머니 메리 P. 그리어슨 사이에서 태어났다.

1890년 달하우스대학교, 1893년 파인힐신학교, 1897년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리어슨은 1897년 달아우스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의사 자격을 취득했으며, 1898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어슨이 한국에 오게 된 것은 소래교회의 맥켄지의 영향이 컸다.

신학교 시절 친구인 맥켄지의 한국행은 그에게 적지 않은 도전이었고,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 소래교회에서 활동하다가 1895년 열병으로 사망했던 맥켄지(W. J. McKenzie)의 죽음은 충격 그 자체였다.

목사이면서 의사였던 그리어슨은 1898년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함경도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1899년 2월 13일 원산에 정착했다. 그는 캐나다장로회가 파송한 최초의 내한 의료선교사다.

1901년 함경북도 성진에 선교지부를 열고 교회와 학교(보신여학교), 1902년 제동병원을 설립했으며,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간도까지 전도 활동을 확장했다. 1935년 정년 퇴임 후 귀국해 1965년 별세했다.

그리어선 선교사가 원장으로 재직하던 성진 제동병원 앞에서 직원들과 함께
그리어선 선교사가 원장으로 재직하던 성진 제동병원 앞에서 직원들과 함께

● 정동교회와 소래교회에서의 첫 설교

캐나다를 떠나 제물포에 도착한 그리어스은 상륙하기 전에 아내와 함께 아침 예배를 드리면서,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라는 창세기 29장 1절의 말씀을 읽고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하나님, 비록 양떼가 흩어져 있을지라도 야곱이 했던 것처럼 우리들이 주의 품 안으로 양 떼를 모을 수 있도록 하옵소서.”

그들은 동료 캐나다인 에비슨의 환대를 받으며 서울로 이동하여 언더우드의 안내를 받았다. 그리고 한국에 도착한 첫 주일에 그리어슨은 언더우드의 한국어 통역을 통해 정동교회에서 한국에서 첫 설교를 했다.

1898년 11월에 그리어슨과 맥래는 언더우드와 함께 소래교회를 방문했다. 캐나다의 선교사 맥켄지가 순직한 소래교회는 캐나다 선교사들에게는 이미 성지가 되어버렸다. 그리어슨은 저녁 설교에서 맥켄지의 삶을 회고하며 그가 어떻게 캐나다 한국 선교부의 설립에 기여했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리어슨은 맥켄지가 가장 좋아했던 찬송가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을 트럼펫으로 연주했으며, 교인들은 함께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마쳤다.

서울로 돌아와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겨울을 보낸 그리어슨은 이듬해 1899년 캐나다장로회의 선교지역으로 새로 결정된 원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때 그리어슨은 엿새 동안 육로로 이동했는데, 그를 원산까지 인도한 사람이 바로 원산에서 활동하던 캐나다 출신의 독립선교사 펜윅이었다.

● 성진 선교지부 개설-북방선교 교두보

원산에 거주하며 함흥과 성진을 오가던 그리어슨은 성진이 북쪽 지역선교를 위한 교두보로 적합한 도시라 확신했다. 당시 함남의 행정 중심지요 도청 소재지가 함흥이었는데, 그리어슨은 함흥을 희생해서라도 성진에 선교사가 머물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0년 캐나다선교회는 성진에 선교지부를 여는 것을 합의하고, 다음 해 봄 그리어슨 부부를 성진에 보내 성진 선교지부를 개설했다.

함경북도 성진 선교지부
함경북도 성진 선교지부

1901년 성진이 자유항으로 개항되고 외국인이 토지와 가옥을 살 수 없게 되면서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됐다. 그리어슨은 먼저 집과 교회를 짓고 선교사업에 착수했는데, 목수였던 그의 아버지 존 그리어슨(John Grierson)이 직접 한국에 와서 그를 도와주었다.

그는 집을 크게 지어 서재에서 성경과 소책자를 판매하고, 방 한쪽에서는 환자들을 진료할 수 있도록 했다. 이때 여의사였던 맥밀란(Kate McMillan)이 내한하여 그리어슨의 사역을 도왔다.

1902년에는 언더우드 주선으로 여러 선교단체의 지원을 받아 병원을 새로 건축하고 제동병원이라 이름했다. 제동병원은 원산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지역에서 유일하게 수술이 가능한 병원이었기에 환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병원을 잠시 폐쇄했지만, 전쟁 후 1906년부터 다시 문을 열고 의료사업을 펼쳐나갔다.

제동병원은 1909년에 100명의 입원환자와 1743명의 외래 환자를 감당하는 병원으로 성장했다. 제동병원은 외국인이 거주하는 지역이었기에 1919년 3·1운동 당시 기독교인들이 제동병원 앞마당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시 3월 10일 성진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리어슨은 자신의 사택을 시위준비 장소로 제공했으며, 회의에도 함께 참여했다. 그리어슨이 원장으로 있던 제동병원 앞 광장에서 시위가 시작되고 일본 군경의 발포로 부상자가 속출하자 그들을 치료하기도 했다. 또 체포된 교인들에게 용기를 주고자 자신이 직접 교회의 종을 쳤으며, 옥고를 치르는 이들을 면회하고 사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리어슨은 성진에서 교육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교회에서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다가 1903~1904년경에 교실 네 칸짜리 건물을 지어 보신학교를 열었다. 그리어슨은 1935년 은퇴하여 귀국할 때까지 보신학교의 교장으로 아이들을 돌보았으며, 그의 아내도 보신여학교를 세워 여성들을 교육하였다.

1902년 성경공부반 학생들과 함께한 존 로스(앞줄 맨 왼쪽)와 그리어슨 선교사(앞줄 맨 오른쪽)
1902년 성경공부반 학생들과 함께한 존 로스(앞줄 맨 왼쪽)와 그리어슨 선교사(앞줄 맨 오른쪽)

● 활발한 북방선교-회령, 용정 선교지부 설치

그리어슨은 1903년 그의 아버지 존 그리어슨, 럽(Alexander F. Robb)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선교여행을 떠났는데,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에서 그곳 한인들에게 성서를 보급해줄 것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성진을 출발해 도보로 회령을 지나 러시아 국경 노바키에프스크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캐나다장로교회의 연해주 선교가 시작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두만강을 건너는 그리어슨 부부
​​두만강을 건너는 그리어슨 부부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한인들이 많이 거주했는데, 그리어슨은 한인촌을 순회하며 성경을 나눠주고 복음을 전했다. 1906년에는 홍순국 조사와 함께 용정에 예배처소를 마련하고, 1907년 럽(Robb)을 이 지역에 파송하였다. 한국인들의 연해주 이주가 많아지고 기독교인의 수효가 늘면서 1909년에 그리어슨은 러시아를 다시 방문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주관한 성경공부반 강사로 신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쳤다.

그리어슨은 북방지역에도 효율적인 선교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선교지부가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캐나다 선교부는 회령(1912년)과 간도의 용정(1913년)에 선교지부를 설치하고 바커(Archibald H. Barker)와 맥도날드(Donald A. McDonald)를 연이어 파송했다.

● 한국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 일본 병사 구타 사건

그리어슨이 성진에 세운 제동병원과 보신여학교는 당시 민족주의자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그리어슨은 일본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될 만큼 한국의 민족운동에 적극적이었는데, 그의 저항정신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 바로 1908년에 벌어진 일본 병사 구타 사건이다.

이 무렵 성진에서 활동하던 그리어슨은 함경남도 단천에 있는 원덕리 교회 문성기 장로로부터 아들 결혼식의 주례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교회에 도착해 자신의 말을 묶어 놓고 결혼식이 열리는 신부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일본군이 그리어슨의 말들을 무자비하게 다루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에 가보니 4명의 병사가 말 두 마리를 번갈아 가며 타고 있었다. 그리어슨은 말을 타고 있던 병사를 끌어내고 나머지 병사에게 채찍을 휘둘렀다. 그는 덕원장 헌병분견소에서 근무하던 상등병 하마타였는데, 그가 채찍에 맞아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리어슨은 항의하기 의해 헌병대 사무실을 찾았지만, 헌병대장은 오히려 그를 체포하려고 했다. 그리어슨은 이에 그들을 노려보고 일어나 이튿날 성진을 향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결국 그리어슨을 연회에 초청해 그에게 사과하였다.

● 애국운동가 이동휘와 만나다

1909년 애국운동가이자 교육가인 이동휘가 그리어슨을 찾았다. 이동휘는 함남 단천 출생으로 강화지역에서 교육과 민족운동을 전개했었다. 이동휘는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과 강화도 봉기의 배후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가 그해 12월 석방된 후 서북학회와 신민회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이런 이동휘가 1908년부터 고향인 함경도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와 교육운동의 가능성을 살피다가 1909년 그리어슨을 만난 것이다. 그는 그리어슨에게 자신을 캐나다 선교구역 내에 설교자로 써달라고 부탁했는데, 선교부에서 일할 사람들의 월급이 일 년 전에 책정된 터라 성경을 나누어주는 매서인 자리밖에 없었다.

그리어슨은 당시 위대한 애국자로 알려진 그에게 이 일을 하기에는 보잘것없는 일이라 말했지만, 그는 기꺼이 매서인이 되어 곧 허름한 곳과 짚신을 신고 성경 보따리를 등에 짊어진 채 길을 떠났다.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이동휘는 교육 및 전도사업뿐만 아니라 외국선교사 밑에서 신변 보호를 받으며 구국 운동을 전개해나갔다. 전국적으로 유명 인사였던 이동휘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렸고, 그의 영향을 받아 함경도에 많은 교회와 학교들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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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사 열전 이야기는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 김재현 박사의 ‘한반도에 심겨진 복음의 씨앗’(KIATS),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평양대부흥’ 등의 자료를 중심으로 편집했습니다.

사진 출처: 한반도에 심겨진 복음의 씨앗’(KIATS), 미국 프린스톤신학교 도서관 Moffet Korea Collection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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